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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이해_방통대_기말과제물

Nomad Kim 2023. 12. 23. 09:06

플라톤의 향연

 

내용요약

 

  플라톤의 향연은 사랑(에로스) 에 대한 아가톤, 소크라테스 등의 참석자들의 찬양과 알키비아데스의 소크라테스를 향한 즉흥적인 찬양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아폴로도로스가 그 향연에 참석했던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아리스토데모스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를 동료들에게 말하면서 시작된다. 최초 화자인 아리스토데모스가 얘기했던 순서 그리고 방식에 따라 재현되는데, 마치 액자 속 안 액자 속에 들어가며 겹겹의 이야기들을 하나씩 벗겨 핵심을 찾아가는 느낌을 준다.

 

  아리스토데모스는 평소와 다른 차림새로 멀끔한 모습을 한 소크라테스를 만나서 엉겁결에 초대도 안 받은 상태에서 아가톤의 향연장에 동행하게 되었다. 그는 사색에 빠져 뒤처진 소크라테스보다 앞서 향연장에 도착했는데, 초대를 받지 못했던 상황이라 난처해했지만 아가톤의 환영을 해주어 향연에 자연스레 동석할 수 있었다. 전날 과음으로 술이 잔뜩 취한 파우사니아스로 인해 에뤽시마코스가 실질적인 진행자를 자처하며 술은 자율적으로 마시고 이야기로 즐기자는 규칙을 만들었고 이야기의 주제를 그동안 심하게 홀대 받았던 에로스에 대한 찬양을 하는 것으로 결정한다.

 

  먼저 파이드로스가 연설을 시작하는데, 그는 거의 무제한적인 찬사를 했다. 에로스가 가장 오래된 신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에게 있는 최대선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또한 우리에게 덕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힘이 있음을 강조하며 에로스를 찬양한다.

 

  파우시니아스는 에로스가 천상의 에로스와 범속의 에로스로 나뉜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전자에 대해서만 찬양이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 천상의 에로스를 위해서는 즉, 비난 받는 빌미 제거를 위해선 너무 어린 소년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법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면서 이후 논의는 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한마디로 사랑의 법과 덕의 법이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아리스토파네스의 차례인데 딸꾹질이 생겨 다음 차례인 에뤽시마코스에게 먼저 이야기하라고 권함으로써 연설 순서가 바뀌게 된다. 에뤽시마코스가 연설하는 동안 아리스토파네스는 이 의사가 처방해 준 대로 숨 멈추기, 물을 입에 물고 울걱대기, 코를 간질여 재채기하기를 차례대로 시도해본다.

 

  에뤽시마코스는 의사답게 의학적인 관점에서 기술의 문제를 말했는데, 의술을 포함한 모든 기술이 에로스에 의해 작동한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각 영역에서 에로스의 일들을 잘 분간하고 적용할 줄 아는 자가 기술자 혹은 전문가라는 것이 그의 요점이다. 사람의 영혼을 넘어 세상 사물 일반, 그리고 신-인간 관계에까지 의 대립자들의 조화를 일구어 내는 우주적임을 주장하며 에로스를 찬양한다.

 

 마침내 딸꾹질이 멈춘 아리스토파네스가 연설을 시작한다. 그는 원초 인간 이야기를 하며 원래 인간의 성은 남, 여 둘만이 아니라 남녀추니를 합해 셋이었다고 말한다. -, -, -, 이렇게 세 조합이 있었으나 이 힘과 자만심이 하늘을 찌르게 된 인간들을 그 벌로서 제우스가 절반으로 자르게 되었고, 상대방 속에서 자식을 낳을 수 있도록 만들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얘기한다. , 각 인간이 자신과 짝을 이루었던 반쪽의 성을 쫓아다니는 것이고, 이는 결국 애초의 자기 것인 그 온전함을 회복하고자 하는 욕망이라는 말이다.  즉 온전한 옛 자기를 회복할 때 행복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동시에 얌전히 있지 않고 신에게 대들면 다시 잘릴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안고 살아간다고 한다.

 

  중간중간 소크라테스가 걱정되는 모습을 내 비치는데 왜냐하면 에로스 전문가라 불리우는 아가톤이 그보다 먼저 말을 잘하는 경우의 부담감 때문이라고 한다. 허나 아가톤은 소크라테스가 일부러 자신을 긴장시키기 위한 연기를 하는 것이라 대응하며 공방을 이어나간다.

 

  아가톤은 에로스가 가장 아름답고 훌륭하기 때문에, 모든 신들 중 가장 행복하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에로스가 가장 젊다는 것, 섬섬하다는 것(무른 성품), 형태가 유연하다는 것을 그 이유로 든다. 이어 훌륭하다, 즉 덕을 갖추고 있다는 논점은 불의를 행하지도 당하지도 않기에 정의롭다는 것, 쾌락을 이기기에 절제 있다는 것, 가장 용기 있는 아레스도 사로잡으니 정말 용기 있는 자라는 것 등을 이유로 들며 에로스를 찬양한다. 마치 에로스의 화신이 된 것처럼 에로스의 찬송까지 한 덕분에 참석자들의 열렬한 환호를 이끌어내었다. 소크라테스는 다시 한번 걱정하는 모습을 내비치며 일종의 밑밥을 깐다.

 

  마침내 소크라테스 이야기가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그는 먼저 아가톤에게 공감하며 먼저 에로스가 어떤 자인지 이야기한 후에 에로스의 기능을 다루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에로스라는 것은 무언가를 욕망하는 것이고, 욕망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결여된 것을 욕망하는 것이기 때문에, 에로스가 아름다움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냈다(아가톤의 인정을 받아낸다).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만나 대화를 나누었던 이방 여인 디오티마의 의견을 말하기 시작하는데, 요는 에로스는 중간자 라는 것이다. , 가사자와 불사자 사이의 존재인 신령이라는 것이다. 에로스란 좋은 것을 늘 소유하려는 욕구이다.

 

모든 사람이 몸과 영혼에 있어서 임신 상태이고 일정한 나이가 되면 낳기를 욕망하는데, 사랑은 아름다운 것 안에서 낳기를 추구하는 것이라는 귀결을 얻게 된다. 이를 추구하는 이유는 바로 출산이야말로 가사적인 것이 불사적인 것에 다다를 수 있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새로운 것인 자손으로써 영원을 추구한다는 주장이다. 그녀는 종 만이 아니라 각 모든 개체도 이 생겨남의 과정을 반복한다고 말하는데, 각 개체의 일생동안 잃고 생겨남을 경험하며 몸 뿐 아니라 영혼, 감정, 정서, 성격 더하여 앎 에 있어서도 이 떠나감과 생겨남이 있음을 강조한다. 이로써 결국 사랑이란 것은 모든 것들을 매 순간 존재하고 살아있게 해주는 어떤 강한 힘이라는 논점을 확립한다. 덕을 영혼에 있어 임신한 자들이 아름다운 몸과 영혼을 나누려는 교육적 시도를 하고 그들로부터 태어난 아이는 이를 공유한 결과물이므로 불사의 것이라는 주장이다. 소크라테스는 그녀에게 설득당했기에, 그 또한 참석자들을 설득하려 한다.

 

  갑자기’ 나타난 술취한 알키비아데스가 동석함으로써 향연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는데, 소크라테스 옆에서는 다른 누구도 찬양할 수 없다는 그의 말에 에뤽시마코스는 그에게 대신 소크라테스를 찬양하라 말한다.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를 겉은 무지로 둘렀지만 속은 절제로 가득 찬, 겉은 장난스럽지만 속은 진중한 아이러니의 인간이라 주장하며, 자신만이 진정으로 소크라테스의 속을 들여다 보아 그 아름다움에 반한 인간이라는 것, 그리고 그 자신의 풋풋한 청춘이 가진 호소력으로 소크라테스의 마음을 사로잡아 소크라테스와 깊은 관계로 발전할 수 있다 기대했다고 말한다. 그 기대로 여러 차례 접촉하여 유혹을 시도하며 심지어 잠자리를 같이하여 육탄 닥공의 상황까지 연출해 보았지만 전혀 끄떡 없었다는 이야기까지 하며 소크라테스를 찬양한다.

 

 허나 소크라테스는 그를 의심한다. 찬사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답사는 찬사 자체보다는 찬사 속 깊숙이 자리잡고 있을 의도에 대한 이야기이다. , 알키비아데스가 자신과 아가톤을 떼어놓기 위해 실레노스/사튀로스 극을 벌인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결국 소크라테스의 의중에 부응한 아가톤이 소크라테스의 아래 자리로 옮기려 하자 다시갑자기’ 술꾼들이 떼로 몰려와 통제 불가능한 상태의 강제로 술을 먹어야 하는 상황이 되어 버리며 이 향연은 끝이 난다.

 

감상

 

  이 철학가들은 사랑의 신인 에로스에 대해 이야기하며 찬양과 에로스의 존재 자체에 대한 의견을 아주 논리적으로 나누고 있지만, 오늘날 우리가 술 한 잔 기울이며 소소하게 또는 진득하니 나누는 연애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가벼이 말하거나 들었던 사랑의 힘이라는 것이 아주 오래전 철학가들 사이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였다는 점이 흥미롭다.

 

  물론, 향연에서는 희생하는 부분에 대한 내용은 없지만 그리고 향연은 사랑에 대한 철학적인 관점의 이야기 이지만, 과연 이 사랑의 힘이란 진정으로 무엇이고,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고 다른 이의 목숨을 살리는 이 사랑이라는 것이 어떻게 생겨날 수 있는지 생물학적인 관점에서는 개인적으로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론,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라는 책에서는 그러한 희생이 본인의 유전자를 더 오래, 이 책의 내용을 인용하자면 불사하는 것에 더 유리하기 때문이라 말했지만, 나는 여전히 납득이 어렵다. 그래서 이 책이 흥미로웠던 것 같다. 물론 에로스는 연정과 성애의 신이자 결핍된 것을 욕망하는 신이지만, 그 또한 사랑을 이해하기에 도움이 되었다.

 

  또한, 물론 그 당시의 철학가들이었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이야기와 대화에 진심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논리적으로 상대방을 설득시키려는 시도들이 뒤섞인 뜨거운 대화들에 보이지 않는 특유의 긴장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디선가에서 들었던 인간의 몸은 원래 하나였다는 말을 한 철학가가 아리스토파네스 였다는 걸 알고 뭔가 반갑기도 하면서 한편으로 그의 주장이 참이나 허황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당시엔 종교적인 관점에서 판단을 내릴 수 밖에 없는 시대적 분위기와 인식이 있었겠지만, 그렇다면 짐승들은 어째서 두가지의 성으로 나누어져 있었던 것인지 궁금하다. 짐승들은 하등한 존재라 이미 형벌을 받아 그 몸이 이미 나누어져 있는 것이라 대답할까. 만약 온전한 옛 자기를 회복할 때 행복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라 주장했던 그의 말이 맞다면 또는 그 말이 진실이 아닐지라도 그런 생각에 도달한 그의 마음에 대한 대중들의 충분한 공감이 그 당시에 이미 있었다면, 오늘날 다양한 성적 지향성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된 수많은 국가들의 미성숙한 사회는 왜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인지 의구심이 든다. 이 책에 나오거나 나오지 않은 수많은 영향력 있는 철학가들이 이 문제에 대해 셀 수 없는 의견들과 공방을 주고 받았을텐데, 왜 여전히 세상은 세상의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각자의 잣대로 정의를 내리고 편 가르기를 하려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모르면 모르는대로 자신들의 무지를 인정하고 함께 천천히 알아가면 될텐데 성미 급한 세상이 새삼 아쉽다.

 

  소크라테스의 의견, 더 정확하게는 이방 여인 디오티마의 이야기가 내게 있어서는 가장 설득력이 있었다. 평상시에도, 사람이란 생존이 가능한 상황이 보장된 조건 하에 결핍된 것을 채우기 위해 생각하고 움직인다고 생각해왔는데, 디오티마가 그 점을 짚어준 것 같다. 이에 더하여, 결핍이란 좋은 것에 대한 결핍이고, 즉 스스로 더 나아지기 위해 욕망하는 것이다. 내게 있어서는 영원하게 살아있는 상태라 함은 나 자신의 건강을 통한 살아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불사적인 것에 다다를 수 있는 방식이 출산이기 때문에 아이를 갖는다 는 디오티마의 말은 공감이 가진 않았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몸과 영혼에 있어서 임신 상태이고 일정한 나이가 되면 낳기를 욕망하는데, 특히 사랑은 아름다운 것 안에서 낳기를 추구한다는 말은 감정적으론 공감이 갔다. 내 아이를 갖는다면, 나와 함께 할 사람이 아름다운 것 즉 나의 배우자였으면 좋겠다는 의미로서의 공감이다.